안녕… 기섭아!

안녕… 기섭아!

주일날 오후 기섭이와 작별인사를 했다. 육신의 부모를 떠나 영적인 아버지의 품에서 고이 잠자는 모습이었다. 기섭이가 좋아하던 찬양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으며 심 목사님이 준비한 영상을 보는 학생들, 우리들의 가슴에 가을비가 내렸다.

암 투병으로 스무 한 살의 해가 훌쩍 지나버렸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러나 고통의 기색은 찾을 수 없는 평안한 모습이다. 몇 년 전 교사로 중고등부를 함께 섬길 때 엉덩이를 씰룩 씰룩하면서 손뼉 치며 찬양하던 기섭이, 언젠가 형 준섭이와 함께 차를 타고 수련회장을 가며 나누던 대화는 진솔하고 신앙심이 순수한 청년이었는데, 그동안 좀 더 함께 해서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항상 내일이 있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기섭이의 건강회복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 벌떡 일어나면 전도도 더 쉽게 되지 않을까? 한번 기도에 감옥 문을 활짝 열고 박해하던 유대인 앞에 베드로와 바울을 세우시던 하나님이 왜 야고보를 목 베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했을까? 새벽이슬 같은 청년을 향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실까? 능력이 부족하신 걸까? 스쳐 가는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다.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전도했고 스데반은 한 번의 설교로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얻은 바울 사도를 통해 이방인을 향한 전도가 시작되어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이 전 세계 복음 전파의 효시가 된 것이다.

월요일 새벽 4시, 아들 돌보느라 많이 야윈 두 집사님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기도했다. 이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위로 할 수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그 큰 아픔을 승화시켜 남은 생애를, 혹 비슷한 환경으로 만나는 자들을 향한 위로자로 다가서길 하나님이 원하심은 아닐까?

준섭이도 동생 몫까지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는 아들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될 것을 소망해본다. 지금은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먼 훗날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기를 기도한다. 나의 가족뿐만 아니라 갈보리 교회에도 기섭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있기에 기섭이를 하나님께로 돌려 보내드릴 수가 있는 것 아닐까?

기섭아 나중에 만나자!

박영태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