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하기

이웃 사랑하기

여름의 끝자락을 물고 매미 한 마리가 남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타운 하우스는 텅 빈 듯 조용하고 승용차들도 벌써 어딜 갔는지 듬성하다. 몽당 빗자루 하나 들고 앉은걸음으로 현관을 쓸어 나간다. 햇볕의 무게가 어깨 위에 도탑게 내려앉는다. 방학은 끝났지만, 아직도 한낮엔 더위를 느끼는 늦여름, 집 앞 목책과 꽃 지고 난 군자란 사이에 거미가 줄을 쳐 놓았다.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속에 구슬을 꿴듯 영롱하다. 너무 고와서 걷어낼까 말까 망설이며 들여다 보는데 위쪽에서 거미 한 마리가 명주실 같은 줄을 타고 내려오더니 가는 다리를 버티며 끄덕끄덕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낮거미는 반가운 손님이 올 징조라던데… 다른 거미들은 이런 경우 줄행랑치기 바쁜데 그 녀석은 도망치지도 않는다. “하, 요 녀석 봐라.” 기 싸움 중인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진다. 손차양하고 올려다보니 해를 등지고 시커먼 실루엣으로 웬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위층에 이사 올 사람이며 아내와 남매가 있다고 공손하게 자기를 소개한다. 몇 주 비어있더니 그 둥지를 채울 사람인가 보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남미 쪽이 아닐까 생각하며 어디서 왔느냐 물으니 브라질에서 왔다 했다. 나는 “맞았네.” 하는 반가움에 한 손에 몽당 빗자루 또 한 손엔 쓰레받기를 든 채, “아! 삼바.” 하곤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는 시늉을 했다. 그 무렵 브라질에선 삼바 축제가 열리고 있어 티브이 속 외신들이 온갖 장식을 한 늘씬한 무희들을 소개하곤 했었다.

사람이 살면서 때론 예기치 않은 작은 일로 인간관계가 쉬워질 수도 있는 것 같다.둘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매미가 놀라 갑자기 뚝 울음을 멈춘다. 대신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꽃밭 속으로도 추녀 밑으로도 녹아 퍼져든다.

그네들은 그날 그렇게 내 곁으로 왔다. 그날 이후 내가 칭하는 그 남자의 이름은 삼바, 삼바네다. 삼바는 만날 때마다 안부나 날씨 얘기 등 그때에 알맞은 인사를 하기도 하고 내가 차 트렁크에서 장본 것들을 들어 나르는 것을 만났을 때는 손수 옮겨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삼바네 아이들이 하학했을 때 잠시 집이 잠겼으면 책가방을 우리 집에 던져두고 마당에서 놀며 우리 전화를 빌려 저희 엄마나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었다. 뭐 대단한 것을 도와주지는 못했어도, 우리 내외는 붙박이처럼 살며 그냥 자질구레한 일로 쓰임받곤 했었다. 이러구러 삼 년 가까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몸피가 좀 두터운 가무잡잡한 젊은 여자가 자기는 위층에 이사를 온 사람이라고 인사한다. 깜짝 놀라서, “삼바네는? 아니 그들은?” 하고 물으니 벌써 이사를 갔다는 게다. 그 후로 여러 날을 섭섭해 했다. 가끔은 울컥 하는 마음에 눈앞이 흐려지기도 했었다.

돈이 드는 것도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가면 간다 인사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금주의 운세에서도 버린 나이에 살고 있다. 앞으로의 일이 궁금한 것보다 보낸 세월 속에서 알고 지낸 이들과의 인연이 소중하고 살가운데…브라질 사람과 한국 사람이 뉴질랜드에서 만나 한 지붕을 쓰고 삼 년을 살았으면 소중한 인연이 아닐까.

얼마 후 이른 아침 딸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딸네 옆집으로 이사 들어올 사람이 자기네 식구는 몇이며 식구들의 이름을 쓰고 몇 날 몇 시에 이사를 들어오는데 혹시 이사 때문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몇 번으로 전화 주시면 고맙겠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A4 용지에 정갈하게 타이핑된 편지가 봉투에 담겨 아홉 가구의 우체통마다 들어있더란다. 얼마 전 내가 말없이 떠난 삼바네 때문에 끌탕을 한 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땐 “여기선 다 그래 엄마.” 하며 나를 위로하더니 자신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듯 목소리가 튀어 오르는 공 같다.

하긴 이사하면 이웃 간에 시루떡 돌려먹던 토종 한국 정서를 고무래 끌듯 끌고 태평양을 건너온 나의 촌스러움이 유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말과 국적이 다른 네 가구가 한 지붕을 쓰는 이곳 뉴질랜드에서의 나의 이웃사랑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 나는 새로 이사 온 여자가 삼바와 국적이 같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그시 눌러놓았던 마음의 사립문을 이 아침 슬그머니 열어 놓는다. 닫을 때처럼…

이경자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