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단상들 – 창립 12주년 특별기고

추억의 단상들 – 창립 12주년 특별기고

단상 1
12년전 창립예배 광고의 끝부분입니다.

“누가 교회 창립하면서 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직 고상한 답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오클랜드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밖에는 할말이 없습니다. 너무 속물 근성에 젖어 있는 목사라고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실 겁니다. 창립 예배인데도 목사 아빠 체면 봐주지 않고 설교 시간에 잠든 10살짜리 아들을 보며 얼마나 재미 없는 설교면 잠이 들었을까? 하며 자책해 봅니다. 축하해 주려 오신 주님의 교회 장로님 한가족과 저희 가족만 드린 창립 예배. 넓은 예배당에 점하나 찍어 놓은듯 합니다. 텅빈자리, 텅빈마음..

– 1999년 7월 한국신문 창립예배 광고

단상2
Samoan church를 떠나 2001년 2월 4일 Khyber Pass Rd에 있는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에서 영성이 넘치는 이전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의 뜻에 따라 제가 Roger Hill 신부님과 교회 멤버들을 식당으로 초대했습니다. 참석 인원은 13명, 마침 신부님이 제 옆자리에 있었습니다. 심도있는 기도로 제 내면을 가다듬으며 신부님에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호쾌하게 웃으시며 “당신들의 교회도 우리들의 교회도 아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부담없이 사용하십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사용료는 월 $300 송구스런 마음에 $100 더 드렸더니 한사코 거부하시고는 오히려 목사님 사무실과 교회 살림방도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 – 할렐루야!

단상 3
두번의 안수집사와 권사, 장로 장립식, 교회식구들의 환희에 넘치는 축하속에 빈틈없는 진행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한편의 결혼식 장면이였습니다. 늘 부족하기만한 나는 한 켠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기도 드렸습니다. 주여, 새 안수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에게 청지기 의식을 각인시켜 주소서 그들을 통해 영광받으소서.

단상 4
2002년 6월 29일 물심양면으로 우리 교회를 도와주시던 Roger Hill 신부님이 군목으로 이임하게 되어 새로 부임한 로이더 신부님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배 중 개를 데리고 강단에 돌아다니는 사람,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교회문을 잠그겠다고 덜그덕 거리는 사람,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장시간 사용하여 우리교인들은 밖에서 한시간 기다리게 하는 일이 예사였고 사무실과 방을 다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한없이 춥기만 했던 고난의 시간들, 그런데 그때 우리들의 기도는 뜨거웠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홍해를 건너 미디안 광야를 방황하던 옛 믿음의 조상들의 고난의 행군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강단의 말씀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단상 5
Auckland Girl’s Grammar School Hall의 을씨년스러운 학교 강단 예배 2년 후 2009년 4월 19일 St. David’s Church에서 이전 예배, 2011년 7월 오늘까지 첫마음(初心)을 잃지 않는 우리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연단해두신 준비된 목자 이태한 목사님을 리더로 또다른 비약을 꿈꾸며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10여년 전 30여명의 성도가 머그컵 30여개가 든 Box 하나 들고 기도처를 찾아 방황했던, 때를 생각하면 마치 G20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유치한 한국의 위상이 대견스럽듯 오늘의 우리 공동체가 대견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또 다른 확신! – 주께서 우리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자 느헤미아를 주시리라!

단상 6
12년 세월속에서 헤어진 교우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한 참담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고통스러운 이민생활에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어떤 분들은 생활 터전의 변화로 또는 우리들의 사랑 결핍으로 떠나갔습니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변명해 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런 인간적 논리는 분명 이율배반이며 죄악입니다. 영원한 은혜를 구원받은 우리가 영원 자체를 거부하는 모순것처럼.

단상 후기
“주인”이라는 말과 “소유자”라는 말은 다릅니다. 주인은 “Owner”라고 하고 소유자는 “Possessor”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본적인 주인이시며 인간은 임시 소유자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듯 “청지기 의식의 상실” 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구체적 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제 자신을 비롯해 직분자들이 이런 근본적인 자기 위치를 깨닫고 인간과 재물(돈, 권력)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정립할 때 기독교가 비로소 그 “짠맛”을 발휘 할 수 있게 될겁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고 성숙해가기를 12주년을 맞는 아침에 소망해봅니다.

끝으로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40여년전 토요일밤 엄동설한에 사업적 고뇌로 기도라도 하고 싶어 우연히 교회에 들린 K집사가 캄캄한 어둠속에 십자가 있는 벽면을 향해 차디찬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한 목사님을 보고 너무 안스러워 그의 거위털 외투를 가만히 어깨에 걸쳐드렸다.

주일날 아침 예배 후 영락교회 우측 백 병원쪽 문을 나서던 K집사는 깜짝 놀랐다. 주일이면 언제나 문옆에서 땅에 엎드려 구걸하는 장님 걸인의 어깨에 K 집사가 한 목사님께 드린 그 외투(그때만 해도 최고급 제품에 속했다) 가 입혀져 있던 것이다. 집에 오는 내내 K집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와 내가족, 우리 교우들에게 이런 청지기 의식이 회복되는 눈부신 날들이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장 32절

김교섭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