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치고 고민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신앙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인들은 불신자들이 가지지 않아도 되는 한 가지를 더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 신앙에서 오는 괴리감입니다.
불신자들이 주일날 교회를 가지 않았다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어쩌다가 반 의도적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 맞을 일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뭔가 모를 찜찜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저질러도 남들이 모르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죄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위안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이 두근두근, 얼굴이 붉어지며 신앙인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과 현실의 괴리감이 어쩔 수 없다는 한계상황 때문일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스파이로 오해를 받습니다. 총리대신(요셉)은 시므온을 볼모로 붙잡은 뒤 고향으로 가서 식구들에게 양식을 준 다음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시므온을 풀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야곱은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부인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과 베냐민 중 요셉은 어릴 때 죽었고 그나마 베냐민에게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고 있는데 베냐민마저 보냈다가는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베냐민은 포기하지 못하는 야곱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주지 않는 한 시므온은 감옥에 있어야 하고 계속되는 기근으로 식구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베냐민을 놓았을 때 그 야곱의 식구들은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힘겨워 하는 것은 혹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이나 세상적인 ‘베냐민’ 때문은 아닙니까?
그 베냐민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괴리감 때문에 힘겨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것 다 포기해도 그것만은 안된다는 그 베냐민을 내 손에서 놓아야 자유함을 누릴 수 있고 괴리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태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