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영원한 현역’으로 불리워지던 방지일(영등포교회 원로) 목사가 평소 기도하고 다짐했던 대로 살다가 향년 103세로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습니다. 소천 나흘 전까지도 북한 선교를 위한 모임에 참석해 축도를 맡을 정도로 그의 삶은 온통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군부 독재 시절을 건너 민주화와 첨단 정보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지난 100년의 한국사를 걸어온 동시에 한국교회의 태동과 시련, 부흥의 역사를 온 몸으로 체험한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일찌기 ‘복음의 씨앗’이었던 할아버지(방만준)와 목사인 아버지(방효원)에 이어 3대째 목사로 일제 치하 당시 보기드문 기독신앙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젊었을 때부터 일찌감치 전도와 선교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시절에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며 한국교회 최초 목사 7명 중 한명인 길선주 목사와 동역했습니다. 신학교를 마친 뒤에는 공산 치하의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21년간 선교사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중국 당국으로부터 추방돼 귀국하여 서울 영등포교회를 담임한 후 은퇴 했습니다.
목사님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 3시부터 시작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글을 쓰고 연로함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인터넷으로 해외 선교사들과 후배 목회자들이 보내온 이메일에 답장을 주고 받으며 교제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고 그가 매주 가르쳤던 ‘월요성경공부’는 1958년부터 55년 이상 이어졌습니다. 특히 79년 은퇴한 뒤부터는 1년 가운데 절반 정도는 국내외 집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복음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인생 모토라 할 수 있는 “녹슬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바랍니다.”를 평생 실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갱신과 하나됨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2007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4개 장로교 연합예배에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강조한 그의 설교는 아직도 많은 후배 목사와 성도들에게 회자 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투항인데, 아직도 우리는 내 주관과 경험으로 무장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또 내려놓고 스스로 낮아짐으로 하나가 되자고 호소한 그는 지난 7월 ‘한국교회와 목회자 갱신을 위한 회초리 기도대성회’를 앞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며 바지를 걷은 채 손에 든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 쳤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균형 있는 신앙을 중시하는 고인은 “길다란 시험관과 같은 신앙은 깊이는 있으나 넓지 못합니다. 반면 대접과 같은 신앙은 폭넓게 수용하는 듯하지만 깊지 않아요. 우리 모두 깊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넓어지도록 노력합시다. 좁고 얕다고 불평하지 말고 깊어지도록 애씁시다.” 균형과 포용이 절실한 요즘, 고인은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갔습니다.
신학생 시절, 목사님이 섬겼던 영등포 교회가 같은 노회여서 노회주관 행사를 할 때나 특별 세미나를 할 때면 (이미 그때는 은퇴후 원로 목사) 먼 발치서 얼굴을 뵌 것이 전부였고, 개인적으로 단 한마디를 나누어 본적이 없지만 그분의 삶을 통해 보여준 목사의 길은 후배로서 배우고 따르고 싶고, 존경하기에 충분한 삶이었습니다.
큰 교회 목사는 많으나 큰 어른은 없는 한국 교회는 또 한 사람의 큰 어른을 떠나 보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또 한분의 선배요, 주의 종인 당신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 걸음걸음을 감히 흉내라도 내 보려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이태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