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를 모를뿐더러 일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번역된 일본 소설 조차도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쓴 기독교 신앙 소설은 몇 권 읽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 신자였던 엔도 슈가쿠가 쓴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침묵’ 등입니다. 그중 에 ‘침묵’이라는 소설은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의 기독교(정확하게는 천주교) 박해를 다룬 소설입니다.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들어 온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당시 일본 내에는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수십만에 이르는 기독교인을 확보하였지만, 정치적인 변화와 외세에대한 경계의 목적으로 에도막부 정부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배교를 거부하거나 기독교인임을 드러낸 이들은 잔혹한 고문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시기에 로드리고와 또 다른 신부가 순교할 각오로 일본 선교를 자원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본땅을 밟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선교 중에 결국 발각되고 로드리고 신부는 농민 신분의 기독교인들이 잔혹한 고문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결국 종교를 저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교 본부는 의아하게 생각을 합니다. 분명히 순교를 사모하면서 자원하여 일본에 간 신부가 예수를 부인하고 종교를 배반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한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위하여 다른 신부를 파송합니다.
그러면서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선교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 마을의 영주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계획을 하다가 신부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 만일 당신이 예수를 부인하면 당신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 영주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책을 밟고 지나 갈 것을 말합니다.
선택해야 할 날이 점 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책에 그려진 예수님이 신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립니다. “ 밟아라. 밟아. 나는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이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침묵하고 있던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결심하고 고통 속에서 성화를 밟습니다. 그래야만 저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위를 보면서 그럴 수 있나 주먹을 쥐고 자신은 의로운척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타인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래야만 했던 숨은 형편의 진실이나 의미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빌라도를 향해서, 대제사장을 향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주님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또 다른 웅변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에는 엄청난 사랑의 함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히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그 몸이 찢김을 당하고, 다시 능욕을 받으시더라도 주님은 “밟아라, 밟아. 나는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침묵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에 대해서도 침묵하십니다. 당신이 짊어지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책망이나 야단을 치시지 않고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말입니다.
이태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