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오후 ‘신앙의 토대’ 주일반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여러 성품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에 대해 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많이 듣고 배워서 익히 아는 것이라 교과서적인 대화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사랑이라고 마무리 지으려는 데 갑자기 한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어떤 집에 키우던 병아리가 병이 들었는데 그 병아리 고치려면 그 집의 아들을 죽여 삶아서 그것을 병아리에게 먹이는 방법밖에 없어서 그 집안의 아버지가 그렇게 했다. 이것이 아들 예수님을 인간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자 함께 공부하던 성도들이 모두 뒤통수를 얻은 맞은 듯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놀라는 이유가 뭐, 설마 그 정도일까? 너무 비약된 이야기 같다,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등 다양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지는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된다’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멍하니 있는 성도들에게 제가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병아리와 아들은 피조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위해 죽는 것과 창조자가 피조물을 위해 죽는 중 어느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것이냐? 라고 말입니다.
모두들 후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쉽게 받아들이기 난처하다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너무 많이 들어서 당연시(?) 했을 뿐 그 사랑의 깊이에 대해서는 별로 느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고 귀가 닳도록 들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고 삶으로 고백되지 않으면 그 들음은 웅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한 말이라서 우리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창조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또한 죽어 주신 그 사랑의 깊이에 대해서, 넓이에 대해서 그러려니 했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토대’ 성경공부를 통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터득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고 그 사랑이 희미해질 때 병아리를 생각하자며 1과를 마쳤습니다.
이태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