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

설교준비를 마치고 긴장된 주일을 앞둔 어젯밤 자정쯤의 교회 사무실로 내 좋은 친 구 차 목사가 한국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설교준비 다 했냐는 서로의 인사에는 고생 깨나 했다는 위로와 이짐에서 벗어나 긴장없는 안식일을 맞고픈 자유로움에 대한 갈증이 묻어 있었습니다.

친구가 대뜸 “오늘 오전에 아내와 함께 영화 ‘화려한 휴가’ 를 보고 왔다”는 말을 하면서 ‘보면서 많이 울었다’ 는 말에 갑자기 막힌 가슴이 열리는 듯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눈물은 부모님 돌아가실 때를 위해서 겨우 남겨놓은 분량 만이 있는 줄로 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아픔에 함께하지 못했던 죄스러움을 어둔 영화관에서 눈물로 사과한 친구가 있어 나는 아직 살아있는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1980년, 친구와 나는 총학생회 임원을 함께하며 다음날 서울역에서 있을 “서울의 봄 ” 집회를 위해 허름한 여관에서 밤새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젊음은 있으나 용기 없어 시대의 아픔을 그저 멀리서 바라다 보아야만 하던 우리들이 여기 살아있음을 알리는 최소한의 몸부림이라 여겼습니다.

이제껏 나는 주변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는 처세술로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 그런데 젊은날의 아픔을 기어이 버리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살아온 친구가 있음에 고마웠고 그 날 죽어간 분들 앞에 눈물로서 미안하다고 말한 친구가 있어 더욱 고마웠습니다.

그래 친구야!
우리 그렇게 용기 없었던 일들 앞에 눈물이라도 홀리자구나.
아픈 당신들을 위해 아무것도 되어줄 능력 없지만 함께 아파 할 줄은 안다고 그렇게라도 보여 주자구나.

요란한 5월의 행사도 지나간 지난 5월 말, 참배객 한 사람 없는 광주민주화운동 공원묘지에 아내와 함께 갔었습니다. 거기 쓸쓸히 세워져 있던 그들의 묘비명을 아내 와 단 둘이 하나하나 읽으며 “미안합니다 ” 며 눈물 흘리고 돌아온날이 있어 내 좋은 친구와 한 마음이였음을 이 또한 고마워합니다.

김성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