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는 아쉬움

‘좋다’는 아쉬움

단기선교를 위해 다른 나라에 1주 혹은 2주 정도씩 머물기는 했으나 8년 가까운 시간을 한 곳에 머물기는 뉴질랜드가 처음입니다. 어느 나라보다 빼어난 자연환경, 적당한 기후, 그래서 안식을 위해 오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고 뭇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부러워하며 찬사를 받는 이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좋다’는 의미가 정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면만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더욱이 수요예배에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줄곧 되뇌어지는 것은 뉴질랜드가 가시적인 박해와 위협 속에 살았던 초대교회 상황과 같은 현실은 아니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은 어떤 ‘신앙적 박해와 위협’이 어느나라보다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곳의‘박해와 위협’은 초대교회 상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본질은 다를 바 없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외부적인 박해와 고통을 받아 신앙이 허물어졌고 위험에 노출 되어 있었다면 뉴질랜드는 외부적인 환란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좋다’라는 그 의미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앙을 와해 시킬 수 있는 원인 제공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수요예배를 안 가는 것이 이상하지만 여기서는 가는 것이 특별합니다. 한국에서는 새벽기도를 안 가는 것이 부끄럽지만 이곳에선 새벽기도회에 간다면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입니다.

한국에선 그래도 신앙의 열심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면서는 ‘자유와 누림’에 치중하다보니 그 열심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 무너짐을 무너짐으로 보기 보다는 으례 한국하고 다르니까, 현실에 적응해야지 하는 아전인수격의 합리화로 여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와 바람이 모자를 쓰고 가는 사람을 보며 누가 먼저 벗길 수 있는가 시합을 할 때 바람이 불수록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붙잡았지만 해가 점점 더워지니까 스스로 모자를 벗어버린 것처럼 뉴질랜드가 주는 환경의 안락함과 안주에 신앙의 모자를 다 벗어 던져버리는 그래서 이곳이 바로 모양과 상황만 다를 뿐 바로 로마시대의 위험이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대교회 시대와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그때와는 결코 비교 할 수 없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꼭 그 시대처럼 살아야 한다는 절대성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당위성은 또한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달리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게 아니질 않습니까? 신앙은 내 삶의 근거가 되는 것 인데 그 삶의 근거를 때와 상황에 따라 바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다’는 것이 내 신앙을 허무는 작은 여우는 아닌지, 신앙생활에 거침돌이 없는 현실이 오히려 그나마의 내 영적 상태를 소리없이 갉아먹는 바이러스가 아닌지 살펴보며 신앙의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태한목사, 2011년 1월 2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