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시골의 어느 한적한 병원에 2개월 정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입원실 창가, 담을 사이에 두고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이웃집 무화과나무가 길게 가지를 내린 상태에서 주먹만한 무화과가 여기저기에 달려 있었습니다.
교통사고이기는 해도 다리를 다쳐 먹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던 터라 터질 듯이 익어가는 무화과를 그냥 둘 만큼 인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담 넘어 온 가지에 열린 무화과는 죄다 따다가 (병문안 온 친구들이 땄습니다.)
맛있게 먹은 기억은 이곳에 온 아직도 새롭기에 때때로 집사람 등쌀에 못이겨 Pak’n Save에 갔다가 무화과 열매를 보면 사서 먹어보곤 합니다. 그때 그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시장하신 나머지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았으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이 일은 유월절 절기를 맞아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그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환전소를 차린 자들을 향해 분을 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다음 날 아침, 벌어진 예수님의 의의 분노였습니다. 사실 그때는 아직 무화과 열매가 맺혀질 계절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분노가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는 때를 따라 꽃이 피고열매를 맺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장터로,사업장으로, 환전소로 변질시키도록 묵인한, 그래서 미필적 고의의 간악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의로운 척, 경건한 척 위선에 가득 찬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고 책망하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르 하고 열매를 없는 종교인들을 교훈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의도입니다.만일 나 자신의 삶과 행실에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는 부분을 느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실상 그 사람은 대체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 고민이 자기 자신의 진실된 고민이고,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위한 고민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히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고민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을 고민으로만 끝내는 사람은 꽃만 피우고 마는 나무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변명, 자기 방어만 하다가 중단해버리지 않도록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의 수준을 주님께 도와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는가? 자신의 열매가 없어서 고민하고 열매 맺고자 하는 열정이 진실로 있는가? 그리고 그 고민 후에 자신을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진보가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고민은 참으로 선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좋은 나무로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마시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거룩한 삶의 열매가 풍성히 맺힐 것입니다.
2011년 8월 28일 이태한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