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 절대 표준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다.”
19세기 이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 아래서 옳다, 틀리다 하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오늘날의 사람들은 절대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는 반드시 한 여인과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19세기 전까지는 누구나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받아들이고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이혼이 왜 죄냐?’라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만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고 들게 되면서 절대 표준과 절대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여, 동성애는 죄가 아닌 또 다른 한 면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뉴질랜드는 물론 세계 곳곳에 버젓이 자행되고 심지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컫던 한국에서도 공영방송에서 드라마로 방송을 타고 있습니다.현대의 도덕적인 혼란과 문제는 절대 가치, 절대 표준을 버리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썩 내키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싫은데.”라고 말합니다.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라는 절대 가치에 대해 현대인들은 “그것이 왜 우상이냐?”라고 따지며 절대 가치를 무시해버립니다.
한마디로 교만해진 것이죠. 어쩔 수 없는 아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을 핑계삼지만 내가 먹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는데 어떠냐 하면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 가치를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대 가치라는 단어 앞에 ‘절대’라는 접두어가 붙어 딱딱하고 엄격하다는 뉘앙스를 선입견으로 받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절대 가치를 인정하고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 가치는 절대로 엄격하거나 지킬수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횡단 보도에서 신호가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한다.” 이것이 절대 가치입니다. 파란불일 때 건너지 않고 빨간불일 때 건너면 죽습니다. 이것을 지키기 어렵다고 한다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빨간불일 때 건너도 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생긴 인간은 절대 가치인 파란불에 건너는 것을 무시하고 빨간불일 때 많이 건너 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비극임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신앙에도 절대 가치의 신앙이 있습니다.예수님 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절대 가치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예수님도 구원자가 될 수가 있다 말하여 우리의 절대 신앙의 가치에 은근슬쩍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흠집을 멋있다고 하면서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바지에 구멍을 내고 너덜너덜하게 입고 다니는 것이 멋이라고 느껴 입고 다니는 사람과 같은 현상입니다.
절대 가치, 절대 표준의 신앙은 절대일 때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가치의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버리고도 살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타협하지 않는 절대 신앙이 필요합니다.
2011년 10월 2일 이태한목사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