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이 세상에는 진기한 곳도 많고 신비할 만큼 아름다운 곳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성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해바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소금 덩이가 목화송이처럼 물 위를 뒤덮고, 기이한 모양의 소금 기둥이 동굴의 종유석처럼 솟아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있는 사해는 몇 가지 세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사해의 수면은 바다 면보다 무려 400m나 낮아 지상에서 가장 낮은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곳의 염도는 바닷물보다 10배 정도 짜기 때문에 천연적으로 가장 짠물입니다.
그래서 이 사해에서는 그 어떤 물고기도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물을 담그면 물 밑에서 누군가가 몸을 받쳐주듯 몸이 둥실둥실 뜨게 됩니다. 실제로 십 수 년 전 성지순례의 일정 중에 사해 바다를 갔을 때 수영을 못해도 빠질 위험이 전혀 (?) 없는 바다라는 사실을 체험했었고 어떤 사람은 물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띠었습니다.
크기가 1천 제곱 Km에 이르는 사해는 요르단 강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졌는데 요르단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들어 가는데 그곳의 물은 빠져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해의 수위는 계속 같은 수준을 유지합니다. 그 이유는 그 지역이 워낙 더워 사해의 물이 빠른 속도로 증발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사해는 자연적으로 하루에 약 700만 톤의 물이 증발하는데 요르단 강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물의 양과 증발하는 양이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의 오묘한 섭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증발 과정 때문에 사해의 물은 27퍼센트가 소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해는 우리의 본능적 삶에 대한 그림이요, 움켜잡고 내놓지 않으려는 삶에 방식을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움켜잡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욕구대로 손에 들어오고 간직되는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나누고 베풀고, 손을 펼치는 삶의 방식을 지향하게 되면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삶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놀이 문화, 여가 문화, 오락 문화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음에도 현대인들이 고독과 우울증에 많이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의 방식에 나눔과 베풂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유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살려는 유혹입니다. 내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자아 확장, 자아실현만을 위해 쓰려는 유혹입니다. 돈과 평판과 힘을 축적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사해 바다로 이르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움켜잡은 손을 펴고 삶을 나누고 친절과 정의와 공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무엇을 소유해야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나누고 베풀까입니다.
2011년 10월 9일 이태한목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