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님, 김** 목사입니다. 이것은 연습으로 하는 것입니다. 답신 주시면 감사하겠스ㅈ니가. 아직 문자메세지 보내는것이 서툴러서…. 목사님, 감사합니다. 평안하세요.”
지난 목요일 오전에 받은 문자 메시지로 올해로 여든의 문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노 목사님이 보낸 글에 대한 저의 답신입니다. 젊은 층에서는 거의 일상화가 되어 있는 문자 메시지 편리함과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문명의 이기입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문자 삼매경, 예배 도중에도 문자를 하는 것은 이미 예삿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노종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면서 저를 연습 상대로 삼았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알고 계시는 목사들이 한 두 분이 아닐 텐데 그 순간에 그 목사님에게 생각난 사람이 저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많은 분들 가운데서 제가 그 목사님에 기억된 바 되었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 왔다는 것이죠. 별것 아닌데 혼자서 감동한다구요? 그런가요?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나 화급을 다투는 일이 부지중에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기억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60억의 인구 가운데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심을 아십니까? 연습 상대로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복의 통로로 나를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아도, 못해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카카오톡 친구란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순위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어른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닌 문자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배우려는 열정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손주들과의 눈높이를 함께 하시려는 할아버지의 내리사랑일수도 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공유하려는 노종의 의지는 저에게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심령을 깨우는 음성이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 너는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려는 사모함과 열정이 어느 정도이니? “ 저…저… ㅈ . 부끄러워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잠시 갠 구름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살포시 수줍은 듯 웃고 있었습니다.
메시지 한번 보내보시죠? “ 이거 연습인데요 사랑합니다. 답신 주시면 감사하겠스ㅈ니가”라고 말입니다.
이태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