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월이군요.”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여왕이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하늘을 우러러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달이 바뀌면 “벌써 몇월이네.” 혼잣말을 하지만 올해의 오월은 참담한 고국의 소식으로 한숨과 함께 “어쩌면 좋아.” 라는 말을 함께 토해낸다. 수필가 피천득님은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오월은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라고 쓰고 있다. 지금 고국의 오월은 이름 봄꽃이 지고난 뒤, 향기짙은 라일락이 골목마다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싱그러운 녹음이 성하의 여름을 예고할 때이다. 고국의 내가 살던 옆 저택엔 늙은 라일락 나무가 담 밖으로 절반을 내어주고 있었다.
해마다 라일락이 필 때면 크고 밝은 등을 나무 윗쪽으로 비추게 해놓아 온 동네가 등롱을 밝힌 듯 환해서 지나가는 이도 한번쯤은 담 안쪽을 올려다 보며 애써 맡으려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향기에 취하곤 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아주 편안한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그 집 담 밖 나무 밑에 서면 어느 추억속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만의 비밀스런 말을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이 슬몃 나를 미소짓게 했었다.
푸른 하늘과 신록의 달, 앤 여왕이 마지막 올려다 본 그 하늘은 내 고국의 오월과 닮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곳 뉴질랜드의 오월은 겨울 장마를 예고하듯 자고 일어나면 화초들이 비에 젖어있고 여름 내 말라있던 나무데크에 이끼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아침에 깨면 습관처럼 먼저 열어놓던 창문도 열지 않고, 감기예방 접종이며 눅눅한 빨래 등 겨울 채비같은 일상의 오월에 살며, 슬픔에 빠진 고국의 소식에 티슈통을 옆에 놓고 잘못 써진 원고지를 구겨 던지듯 콧물 눈물을 찍어내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좋게 잘 해주시고자 우리 곁에 부활로 오신 그 분은 또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며 아파 하실까. 어느 시인은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또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며 꽃뿌리며 온다 했다. 고국의 사월은 잔인하게 왔다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피천득 님은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말한다. 나는 어두운 하늘과 가랑가랑 내리는 빗속에서 고국의 오월을 본다. 등롱같던 라일락과 푸른 하늘과 신록을… 마음에 빛이 없으면 환한 방도 어둡다 했다.
슬픔으로 가득찬 가슴 속에 작은 등롱 하나씩 켜드리고 싶은 오월 속에 나는 있다.
이경자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