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장손인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 그땐 이미 먼저 결혼한 시동생의 아들이 벌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난 한 아기를 놓친 후 늦게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엔 한글 이름을 짓는게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아름이, 힘찬이 등 예쁜 이름들을 많이 지었었다. 낳기 전까지는 성별을 모르던 시절이니 남편과 함께 만약 딸을 낳으면 새로 태어난 누구네 하는 ‘새네’라고 지으면 어떨까 하고 농담으로 얘기하며 웃곤 했었다. (참고로 남편의 성은 김씨다.)
어느날 새벽녘 머리숱이 새까맣게 많은 건강한 딸을 낳았다. 조산원의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미역국을 같이 먹고 산고를 함께 했던 남편은 무릎이 튀어나온 양복 차림으로 출근하면서 “그래도 차 한 잔씩은 돌려야겠지?” 한다. 그래도라는 단어가 톡 튀듯 생경하게 들렸다. 저이가 정말 김이 샜나봐, 난 좋기만 한데… 뜨악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데 눈치 빠른 시어머님이 내 손을 감싸 쥐면서 “어멈아, 첫 딸은 살림밑천이야, 고롬 고롬 길치않구. 자래 뭘 몰라서 기래.” 평안도 사투리로 나를 위로 했었다. 그 후론 “그래도”라는 부사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만난 M집사가 자기 남편이 나에게 사과드릴 일이 있노라 하면서 남편 집사님을 불러온다. 며칠 전 앞에서 버벅대던(이건 내 표현이다.) 차에 경적을 울리고 지나치다 보니 운전을 내가 하고 있더란다. 난 알지도 못했었다. 웬만한 경적은 괘념치 않고 나의 길을 가는 게 내 운전철학이기 때문이다.
불자동차나 응급차의 사이렌만 무서워한다. 그땐 아마도 차선변경 깜빡이를 켜고서도 쉽게 진입을 못 했던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한박자 늦은 출발을 했거나… 아무튼 경적을 울린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자꾸 죄송하다 하는 것은 그래도, 그래도 같은 둥지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믿음의 동료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래도라는 단어는 쓰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뜻을 이끌고 오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왕년에 이랬었기 때문에 안되고 그래도 내가 누군데 하며 어려운 일에도 무릎 꿇지않고 이겨낸다면, 그래도의 뜻은 극명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마다 웃기도 또 슬프기도 했을 한 해가 저문다. 그래도 총성 없이 평화로운 또 좋은 자연환경에서 살고 있음을 나는 감사한다. 힘들었던 지난 일들을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새해가 오고 있다. 어떤 날들이 닥쳐올지 전혀 모르면서도 두렵지 않은 것은 그래도 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백그라운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경자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