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주민들이 출근하고 난 조용한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열고 보니 어떤 젊은이가 “흰 차가 당신의 차냐?” 물으며 차를 좀 딴 곳으로 옮겨달라 청한다. 주렁주렁 공구를 매단 허리띠를 두른 모양새가 나무정리를 하러 온 줄 금새 알게 했다.
얼마 전 타운하우스 매니저가 나무정리를 할 거란 얘기를 해서 알고 있던 터이기도 하고… 한동안 시끄러울 것 같아 아예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 장을 보러 나갔다. 굳이 빨리 돌아가 봐야 시끄럽기나 할 것 같아 잘 가지 못하고 궁금해하던 코너도 모처럼 여유 있게 기웃거려 보고 푸성귀와 과일도 찬찬히 보며 골랐다. 이쯤이면 다 끝났겠지, 시간 가늠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잘못 찾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모든 소리가 멈춘 듯, 지나가는 차 소리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뻥 뚫린 하늘이 파랗게 질려 보였다. 마당을 큰 트럭이 그들먹하게 차지하고 있고 그 뒤엔 암팡지게 생긴 나무 분쇄기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입을 꼭 다물고 모든 일은 이미 저질러져 있었다.
집채만 한 큰 나무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점심시간인 듯한 사람은 트럭 운전대에 다리를 꼬아 걸친 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사라진 나무의 뿌리까지 잘라내느라 허리께까지 땅밑으로 가려있고, 그 옆으로는 삽질로 떠올리는 흙과 나무뿌리로 봉분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가슴 속으로 바람이 솨아 지나가면서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지붕으로 뻗은 가지만을 전지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트럭 옆에서 눈물을 찍어내고 있는 키 작은 동양 할머니가 기이해 보였는지 삽질하던 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 후 하던 일을 계속하고 빵 먹던 젊은이가 놀란 듯 후닥닥 뛰어 내려와 열심히 뭐라 지껄이긴 하는데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뻐금대기만 하지 말소리는 하나도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십 년 세월을 같이 했던 나무인데… 얼마 전 타운하우스 운영회에서 몇 번이나 올린 안건이 어렵게 통과된 후 낡은 물받이와 홈통을 교체해주고 간 얼마후였다. 여러 동이 모여 타운을 이루고 살지만 유독 우리 동의 물받이와 홈통이 삭았는데, 그 이유가 옆에 있는 나무의 잎사귀들이 지붕 위로 떨어져 쌓여 막히고 또 썩기 때문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다른 데 보니 전선이 지나가는 자리만 나무를 니은자로 도려내기도 했던데…하긴 그 젊은이들이 무슨 잘못이랴, 하라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그 나무는 큰길과 나란히 인도 옆으로 처져 있는 타운 담장 안에 있던 큰 나무 세 그루 중 하나였다. 잎이 늘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이고 두 아름도 훨씬 넘는 둥치에 굵은 몇 가지는 처억하지 팔꿈치를 방바닥에 세우듯 한번 땅에 멈췄다 다시 하늘로 향하고 그 나무 아래엔 커다란 바위 하나와 작은 바위가 그늘 밑에 품어 안기듯 자리하고 있었는데, 큰 바위에 기대서면 하늘이 가려지고 나뭇잎들은 늘 소슬한 바람을 넉넉히 품고 있었고 그 바람이 솨아하고 바닷소리를 낼 때면 그리운 곳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게 하곤 했었다.
반쯤 덮여있는 윗집 발코니는 시골 원두막을 생각하게도 했었고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로는 나무 밑을 적시지 못할 정도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배곯은 아이의 갈비뼈처럼 나무 발코니는 초라하게 노출되고 운치 있던 바위들은 거대한 쇠똥구리가 굴리다 팽개쳐 버린 그것처럼 칙칙하고 흔한 화산석으로 햇볕에 달구어져 있었다. 또, 그 뒷쪽에 있는 더 큰 플라타너스엔 흰 페인트로 엑스(X)자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그 나무는 내년에 자를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 내년이 왔다. 언제 자르겠다는 확실한 언질도 없이 나무는 흰색 페인트의 X자를 가슴에 안은 채 해를 넘기고 성글어진 햇볕 속에 지나가는 잔바람에도 물색없이 흔들리고 있다. 나무에게도 저주를 하던지 듣기 싫은 소릴 하면 말라 죽는다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말이 정말인가 싶을 만큼 나무는 몰골이 더욱더 어수선하다. 원래 플라타너스는 한여름이 지나면 다 그렇지 않았나 하면서도 지붕 위로 뻗은 많은 가지들을 그냥 두기엔 피해가 클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한다. 두껍고 질긴, 마치 가죽같은 잎사귀는 잘 썩지도 않고 나무가 저리 크니 나뭇잎은 또 얼마나 많이 떨어져 쌓였겠나?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삶의 한계가 있다. 누구나 보이지 않는 X자 앞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하나님께 솎아질 날이 있기 마련이지만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우리 모든 믿음의 동료들은 큰 나무처럼 푸근한 그늘로 이민생활의 힘듦을 서로 다독이고 나 스스로는 행여 세월로 굳어진 고집과 완악함으로 성도 간의 소통을 막는 일은 없는지 뒤돌아 보게 하는 하루였다. 하얀 X자 앞에서…
이경자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