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말 아침, 새벽에 내리던 비가 멎고 해님이 살포시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 때, 그곳 미션베이 주차장엔 벌써 많은 차 가 들어차 있었다. 그다지 많지 않은 빈자리 중 하나에 차를 주차 시킨 후 잠시 누 굴 만나고 온 사이 그만 차의 동력이 방전 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 해 보지만 차는 끼룩끼룩 병든 기러기 소릴 지를 뿐 다시 조용해진다. 순간, “큰일이네! 곧 가야 하는데.” 도로변엔 큰 버스가 토해낸 많은 관광객이 건널목을 건너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리는 걸 보면 한국 관광객들인 것 같은데 반갑기보다 스멀스멀 고립감 같은게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고인다. 어찌해 볼 수 없는 군중 속의 고립감. 나는 습관처럼 트렁크를 열고 빨강색과 검은색의 점프 스타터를 찾아 손에 말아쥔다. 하지만 언제든 양쪽 차 중 한 차의 주인이 와야 될 테고 와서도 차를 돌려 엔진 쪽을 우리 차와 나란히 해야 될 터이다.
양쪽 차들은 모두 후미가 화단 쪽으로 향해 있고, 그 사이에 내 차만이 화단 쪽을 보고 주차해 있기 때문이다. 기도,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지 하는 믿음이 바다 쪽 싱그러움 속으로 나를 쉽게 걸어 들어 가게 만들었다. 보석처럼 영롱한 작은 물방울을 매단 잔디들은 싱싱하고 집을 침수당한 개미들이 부지런히 굴속에서 진흙 들을 물어 나른다. 듬성듬성 나 있는 키 작은 클로버가 꽃부터 피웠다.
클로버 꽃반지를 만들어 왼손 약지에 끼고 팔을 주욱 뻗어 두 눈을 지그시 뜨고 바라본다. 이젠 많이 늙어버린 손 그래서 어릴 적보다 꽃 반지는 더욱 예쁘다. 시티 쪽으로 보이는 바다에는 하얀 요트 들이 엄마가 당겼다 놓은 아기 요람처럼 흔들리며 서쪽 하늘엔 고운 무지개가 걸쳐 있다.
여러 종류의 바닷새들이 깃털을 말리느라 바쁜 모래톱, 그리고 먼 바다를 지나온듯한 바닷내 나는 바람이 폐부 깊숙이 심호흡하게 만든다. 그 사이 활짝 퍼진 햇살은 맞은편 섬을 감싸 안고 있던 얇은 안개조차 걷어내고 있다. 수묵화의 여백처럼… 하지만, 그것은 더욱더 가득한 싱그러움으로 또 촉촉함으로 마음을 차오르게 한다. 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소소한 주변의 일상들이 귀하게 와 닿는다. 무엇 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여유와 이 포만감. “아! 하나님 이것이었습니까?”
이민 온지 수개월 그땐 정말 갈기를 세 운 말처럼 달리고, 전선에 앉은 참새처럼 늘 불안하고, 또 잘 소통되지 못하는 영어로 자맥질하는 것 같은 일상 앞에 그날의 한나절은 나에게 쉼표로 표시된다. 물 론 좋은 키위 차주를 만나 친절하게 차를 돌려 점프해주고 도리어 그가 즐거워하던 걸, 좀 오랜 시간 후이긴 하지만, 뭐 어떠 랴 꽃반지도 끼었는걸… 하나님은 우리가 숨차할 때 쉬게도 하시지만, 절망이라 생각할 때 그때 하나님의 사역은 시작된다. 바로 점프 스타터를 흔들기 전부터.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는 언제부터 하나님을 닮기 시작했을까?
이경자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