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마음의 서운함을 대신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존경하던 목사님이 며칠 전 하나님 품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입니다.
80년대 말 전도사 시절 그분을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그분 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 교제를 한 적은 없습니다. 흔히, 저는 목사님을 알아도 그분은 저를 모르는 그런 사이입니다. 작년 10월 한국에 갔을 때 한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아프신 몸인데도 조용기목사님과 최경주 골프 선수를 소개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모습을 뵌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분의 설교 강의 숱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설교가 명설교라서, 강의가 명강의 라서 더 서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 하나님을 닮고 알아가려는 헌신에 도전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글은 8월호 생명의 삶에 나온, 어쩌면 목사님의 살아생전 지면을 통한 마지막 메시지가 아닐까 하여 싣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그분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 -故 하용조 목사
성경의 모든 말씀을 녹여 한 구절로 만든다면 아마 요한복음 3장 16절이 됩니다. 이 말씀은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번역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에서 구원의 주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대신 인간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역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바뀐 것, 이것이 타락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사랑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습니 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에는 불화가 발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지 않아서, 열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사랑과 다릅니까?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사랑을 확신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사랑은 누구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 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던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하 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란 하나님 자신이 죽은 사랑, 모든 것을 잃고 포기한 사랑입니 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특별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한한 사랑을 받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그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셔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약속하신 복을 모두 누리며, 남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사는 것입 니다.
할렐루야! 이런 삶이 구원의 삶입 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놀라운 사랑을 세상에 나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와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체가 돼야 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하며 온누리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이태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