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14장에 회복의 기쁜 소식이 선포된다.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의 의로움이 아닌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떠났음이니라(4절)”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그들이 돌아와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기를 기다리셨다(14:2). 그것은 지금 우리 각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이스라엘처럼 죄에 넘어짐을 반복할지라도 주께 돌이킬 마음을 주시어 마침내 이루실 영생의 약속에 감사할 뿐이다.
21일간의 ‘다니엘 기도회’가 끝났다. 수년 전부터 이 기도회를 통해 봇물처럼 터지는 보석과 같은 말씀과 간증은 큰 감동이었는데 올해도 은혜의 자리에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함께 눈물로 부르짖는 우리 기도에 성령님의 임재라는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손길이 다가오심을 느낀다. 이 기도회가 우리 갈보리 교회에 불씨가 되어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며 호세아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각 사람에게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심을 본다. 누구에게는 병 고치심, 다른 이에게는 죽음을 통해, 또 목회의 실패를 통해 회복을 이루셨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어찌 병으로 죽어 감이, 어찌 목회의 실패가 회복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성경 말씀을 읽으며 수 없는 의문점들이 있었다. 왜 욥은 의인임에도 고통 앞에 서야 했을까? 그의 자녀들의 생명을 왜 하나님은 사단에게 내어주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를 갈대 상자 속에 넣어 생명을 구하셨다고 기뻐했지만 모세 외에 죽어야 했던 그 시대 히브리 아가들은 어떻게 설명하실까?
예수님 시대에도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무슨 죄로 죽어야 했나? 예수님 때문 아닌가? 이럴진대 어찌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찬양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14:9절에서 말씀하신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하나씩 깨달아지고 있으니 그것은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이 땅의 삶은 찰나에 불과함을 주님 주시는 지혜와 총명 아니면 볼 수가 없다. 아웅다웅 지지고 볶고 우리는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그런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하다. 인생의 마지막이 이르기 전에 우리 주님 만나 뵐 준비가 오히려 시급해진다. 내년 다니엘 기도회에도 내 발로 걸어 성전에 와서 기도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더 간절히 기도의 자리를 찾았다. 가족들도 주위에서도 걱정하시지만 그럼에도 성령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면 내 몸을 질질 끌고라도 참석하여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받아 누리고 싶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그분의 방법대로 이끌어 가시고 또한 동행하고 계심을 믿는다. 어떤 방법 일지라도 아멘 주님만이 옳은 분이십니다, 인정합니다. 손을 높이 들고 박수 치며 찬양할 수 없지만,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 없지만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며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소망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한상순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