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무리들이

그때, 그 무리들이

남이 모르는 나만의 고통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외롭고, 슬프고, 두렵고, 답답한 나만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못 느낄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를 때, 나는 답답하고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그랬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고 예수님께서 생각하 시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 내가 생각할 수도 없는 훨씬 전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그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를 환영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땅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종려주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힘센 말을 타고 위엄있게 으스대며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짐을 지고 나르는 나귀,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임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그래서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원하여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거웠을까요? 사람들이 미련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불과 며칠 후 저 열렬한 환영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메아리 칠 저들이기에 그저 주님의 마음은 검게 타들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기 의, 자기만족, 자기 욕심에 도취하여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무리 속에 내 자신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어찜입니까? 그래서 여전히 주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내년 종려주일이면 저 무리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이태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