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에 내린 비

10월의 마지막 날에 내린 비

길을 걷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던 어제는 10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어느 Shop 앞에서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건너편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사람이 재빨리 타고 온 Wagon의 뒷문을 열어 지붕으로 삼고 걸터앉아 차 지붕을 통해 떨어지는 낙수를 걸터앉은 발로 툭툭 차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몸짓 그것이었습니다.

학창시절, 혼자 산 속에 들어가 있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아직 배낭 속에 그대로 있던 텐트를 뒤집어쓰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할 때 지나가던 두꺼비며 작은 곤충들의 움직임을 온 우주의 움직임처럼 활기가 넘쳤고 뒤집어쓴 텐트는 비를 막아주는 그 어는 공간보다 더 넓고 아득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비가와도 걱정 없는 지붕 있는 차도 있고 젖어도 갈아입을 옷도 충분한데 왠지 Wagon에 앉아 있던 사람이나 텐트를 뒤집어쓰고 앉아있던 그때만큼 여유로운 눈으로 비를 바라보게 되지 않는 것은 이것저것에 찌든 마음이기에 아름다움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배가 부른 탓인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해지는 마음이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여 마음은 가난해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몸은 부자처럼 살고 싶어서였는지 부자가 되지도 못했으면서 마음도 가난한 마음에서 한참 멀어져 있게 된 나를 발견합니다. 세상 구석구석에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손길이 없을까마는 이제는 그것을 찾아 가지는 희열이 예전 같지 흔치 않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가며 눈도 예전 같지 않고 이도 부실해지는 신체적 퇴화에는 민감하면서도 작은 것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지내던 그때가 퇴화되는 것에는 관대해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새로워지지 않는 나를 어디서부터 다시 찾아야 할지 슬퍼집니다. 라이홀드니버는 자기밖에 모르는 강도라는 사람과 자기 공동체에 충실하게 살겠다고 하는 레위인과 제사장 같은 사람,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책임적인 사람으로 인간을 3종류로 구분해놓았는데 나도 그저 내 공동체에만 머물기에 강도와 동급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는 제사장 그룹에 일조되어가고 있음에 놀랍니다

이런 나를 위해 주일예배 대표기도시간에 교우들이 목사를 위해 기도할 때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면서 이렇게 바꿔서 받아들입니다.

“지금은 뭐하나 다를게 없는 우리 목사님이지만 우리가 참고 기다리는 동안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인격자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면 나도 다짐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도 교우들도 도와주세요”.

비를 맞으며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임을 알려주면 그게 뭐 대수로운 날이냐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3년이라는 나이의 차이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렇게도 다르게 나타나는지… 아니면 아내가 이미 낭만을 잃어 버린 것인지. 정작 가관인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내리는 비를 보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하며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리는 나 스스로에 놀라 얼른 바꿉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찬송가부터 나오지 않았음에 미안해 어릴 때 불렀던 어린이 찬송을 한곡 더 부릅니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 이런 나를 낭만을 잃지 않았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낙망스러운 목사라고 해야하는 것인지요?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더 맑고 밝아지기를 애써야 하겠습니다. 점점 둔감해지는 나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묵상해본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김성국목사